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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천운영 / 창비


  책과의 인연은 참 신기하다. 평소의 나라면 전혀 접할 일 없을 듯한 책을 어느 순간 손에 쥐고 집중하여 읽고 있을 때는 짜릿하기까지 하다. 

  한겨레 교육 문화 센터에서 「소설 읽기의 유혹 : 이 시대의 여성 작가들을 만나다, 두번째 장」이라는 강의를 듣게 되었다. 자의 10% 타의 90%로 수강에 대한 결심을 굳혔는데, 오만 원이라는 수강료에 네 명의 작가를 만나고 네 권의 책을 받는다는 특전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첫시간은 천운영 작가와의 만남이다. 주인공은 몇 달전 세상에 나온 『생강』이라는 소설이다. 수업 시간 전 책을 받아들었다. 낯설기만한 작가와 소설 제목.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면서 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온 나라니, 조금 부끄럽고 작가에게 미안했다. 시간이 조금 있었다면 서점이나 도서관에라도 갔을 텐데 이래저래 핑계만 는다. 비록 소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관심도 적었지만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 소설을 읽고 싶어지면 좋겠다고 바랐다. 
  출판한 지 두 세달 지난 데다가 새로운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이미 『생강』의 여운에서 많이 빠져 나온 상태였다. 그러나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저절로 내 바람은 이루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책을 펼쳤다. 요즘 쭉 시간에 쫓기다 보니 버스 안에서도 더 이상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못한다.
  고문 기술자 '안'과 그의 딸인 '선'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시점에서 각각 쓰여 있다. 시대가 바뀌어 안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결국 자신의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의 다락방이자 딸의 궁전이었던 다락방에 숨어든다. 선에게 있어 아버지는 더 이상 어렸을 때 보았던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하고 말아던 정의로운 사내는 사라졌다. 자신은 잘못한 게 전혀 없다며 합리화에 급급한 그는 이빨을 모두 잃은 짐승에 불과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 '선'은 선의 방식대로 그를 고문한다.
 『생강』은 80년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다룬 이야기다. 작가는 그가 복역하기 전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몇 년을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일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은 악행을 저지를 때 자기합리화를 통해 악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집에 와서 책을 마저 읽고 기술고문자를 검색했다. 바로 '이근안'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기술고문자라는 듣기에도 끔찍한 단어를 검색창에 쳤을 때 자신의 이름이 뜬다는 현실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도 끔찍하다. 군사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그는 물고문, 전기고문은 기본이었고 숱한 민주 인사가 그의 모진 잡도리에 무너졌다고 한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피해자였고, 함께 천운영 작가의 이야기를 듣던 수강실 안에도 그에게 고문을 받았던 분이 있었다. 민주화 운동하시던 분이셨는데 그 분의 책에 대한 짧은 소감을 담담하게 듣는 동안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나로서는 민주화 운동 자체가 생소하다. 다양한 곳에서 나의 무지함을 깨닫는다. 얼마 전부터 강준만의『한국 현대사 산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1940 년 대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언제쯤이면 내 무지함이 조금이라도 감춰질 지 걱정이다. 그는 복역을 마치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목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상처 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누가 달래주려나. 그들은 이근안 씨를 용서했을까? 나도 기독교인이고 늘 회개를 하며 살아가지만 마음이 답답해진다. 세상에는 인간의 마음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너무 많다.  

 『생강』이라는 소설 자체는 두 사람의 감정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 하지만 그 뒷편으로 숨겨진 역사 속 사실에 숨이 턱턱 막힌다. 괜찮은 소설과 작가를 알게된 건 기뻤지만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운 주말이다.
  작가-독자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 중 한 분이 작가의 첫 장편이었던 『잘가라, 서커스』를 거론하며 생동감 있는 조선족 사투리가 인상적이라는 말을 했다. 작가는 생생한 조선족 사투리를 그리고 싶어서 무척 공을 들였다며 자부심을 보여주었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조만간 기회가 되면 읽어보아야겠다.


 


생강
국내도서>소설
저자 : 천운영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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