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 위즈덤하우스
표지가 참 예쁘다. 책 내용보다 표지에 먼저 반했다. 일 년여 전 박민규를 전혀 모르던 시절 제목과 표지에 반해 이 책을 구입했던 한 언니가 '왠지 술술 읽히지 않는다.'라는 감상을 남겼을 때만 해도 이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참 뉘집 소설인지 예쁘게 잘 만들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올해『삼미 슈퍼 스타즈의 팬클럽』을 읽고 박민규에게 푹 빠져 첫 단편집 『카스테라』를 엉거주춤 뒤적거리다가 일단『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먼저 읽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단편보다는 장편이지,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독자 대 책으로 다시 만났다. 내 품에 안긴 책은 거듭 봐도 참 예쁘다. 표지는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모티브였던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라는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거기에 반짝반짝거리는 느낌의 효과를 주고 군데 군데 볼록한 느낌을 주었다. 촉감도 좋다. 번거로웠을텐데 여러모로 많이 신경쓴 느낌이다. 역시 대형 출판사의 위엄일까. 한껏 감동하며 책장을 넘겼다. 간단히 말하자면 못생긴 여자와 잘생긴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작년에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외모가 중요한 요즘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 패배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해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여대생이 다니던 홍익대 입시 정보 센터 사이트에는 관리자 이름으로 '공지. 루저는 안 받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오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 이런 상황을 보더라도 '사랑'을 하는 데에 '외모'는 참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도 나는 여자가 나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십여 년간 살면서 외모 따지는 여자보다 외모 따지는 남자를 더 많이 봤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는 용서하지 못해'라는 말을 하는 것도 남자들이다. '못생긴 남자는 용서하지 못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저 공중파 방송에서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지. 아무튼 요즘 '외모'는 가장 민감하면서도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화젯거리다. 어느 샌가 우리는 예쁘거나 잘 생기지 않으면 사랑도 제대로 못 하는 시대에 와 버린 것이다. 행여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못생긴 여자와 잘생긴 남자 커플을 보면 막연히 '여자가 돈이 많겠지.'라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고 말이다. 물론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참 씁쓸하다.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 유난히 못생긴 외모 탓에 늘 혼자였던 여자가 있다. 학교에 다니기도 전부터 항상 놀림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 철저히 외톨이로 지냈다. 뚱뚱한 외모 덕에 친해진 중학교 때 친구는 전학가더니 갑자기 살을 빼고 이뻐진 모습으로 나타나 선을 그었고 최우수 성적에 학교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 간 회사에서는 외모 때문에 줄줄이 낙방한다. 가까스로 집 근처 백화점에 취직했지만 어느 새 '궂은 일 담당'으로 전락했고 타인들의 외면 속에 언제나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짐을 나눠 들며 말을 건넨다. '저랑 친구하지 않을래요?' 처음 취직하여 '하긴 오늘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긴 애를 보긴 했어.'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남자의 속마음을 몰래 훔쳐보던 나도 그들과 같이 마음이 콩닥거렸다. 난생 처음 친절을 받아 본 여자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남자는 점점 가까워진다. 사랑은 참 오묘하다. 살면서 구구절절 이야기해왔던 이상형과 전혀 다른데도 괜히 마음이 끌리고 바라 보게 되고 전화하게 된다. 왜 그럴까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해도 예측도 허용하지 않는 사랑, 문득 나는 비록 바보일지라도 그 기적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했다.
실은 어떤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파반느>로서의 나의 여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비록 느리고 장엄해도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여하간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 반전을 노린 건지 액자식으로 끝나는 구성도 좋았다. 작가왈 해피엔딩임에도 지하철에서 읽는데 눈물 참느라 꽤나 고생했다. 게다가 조금은 지루할 지도 모르지만 주인공 남녀의 친구 '요한'의 냉소적인 세상에 대한 푸념도 괜찮았다. 더불어 남자 작가가 쓴 글임에도 철저히 여자 편에서 쓴 글임에 감동했다. 어떻게 그리도 여성의 마음을 날카롭게 묘사했지? 느낌이 이상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에서 보이는 오버스러운 느낌을 한껏 죽이고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가는 방식도 훌륭했다. 다만 남자의 사고 이후 성급히 흘러가는 세월이 조금 허술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번 소설 역시 박민규 특유의 문단 나눔이 눈에 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굉장히 호불호가 갈린다. 나는 올바른 문장을 구사하기만 한다면 이런 문체를 지닌 작가의 등장과 존재는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말글처럼 읽는 호흡이 편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다만 박민규를 따라 하려는 듯 보이는 신인 작가들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랄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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