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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 마거릿 애트우드, 김선형, 황금가지 

▷ 21세기 중반, 길리아드라는 가상의 나라(미국)

2016년 12월 29일, 행정자치부에서 저출생 대책이랍시고 '대한민국 출산 지도(가임기 여성 인구수)'를 발표하여 많은 이를 분노케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의 의사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이로만 가임기 여성인지 아닌지 구분 짓고, 마치 여성을 애 낳는 가축인 양 지역별로 수치화하여 대대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보자마자 너무 화가 나서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었는데 당장의 상황만 모면하고자 하는 판에 박힌 답변이 돌아와서 더 화가 났던 기억이 있다. 올해 5월 24일 열린 낙태죄 관련 헌법소원의 공개 변론에서 법무부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에 대해 '성관계는 하고 싶어하면서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과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폄훼하고, 정자 주인인 남성이 물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만들어낸 가상 국가 '길리아드'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출산 지도가 여성을 걸어다니는 자궁처럼 다뤘다면, 여기,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겨 여성에게 자궁으로 살라고 강요한 세상이 있다. 전쟁, 환경 오염, 방사능 등으로 인해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고 인류에 큰 재앙이 닥친다. 몇 년 전에 본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떠오른다. 그 혼란을 틈 타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권력을 잡은 것이 길리아드다. 길리아드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데, 그중에서도 여성을 자궁이라는 생식 기관을 가진 도구로 취급하며, 임신가능성이라는 그 기능에 따라 '아내', '아주머니', '하녀', '시녀' 등의 계급으로 분류하여 통제하고 착취한다. 가족과 평범한 삶을 살던 오프브레드는 어느 날 갑자기 이름과 가족을 빼앗긴 채 사령관의 아이를 수태하라고 강요 받는다. 설정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시녀로 사는 오프브레드의 삶과 그 내면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끔찍해져서, 재미는 있었지만 읽는 내내 정신적 고통이 심하다. 훌루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제법 괜찮다고 하니 시간 날 때 한번 봐야겠다. 

내 이름은 오브프레드가 아닌 다른 이름이다. 지금은 금지된 이름이라 아무도 불러주지 않지만. 나는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이름이란 건 전화번호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거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름은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 이름의 기억을 숨겨놓은 보물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와 파낼 나만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이름이 묻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의 진짜 이름에는 마력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적 같은 마력이. 밤마다 내 싱글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으면 그 이름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떠다닌다. 손에 닿을락 말락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떠다닌다.(p.148)


2. 얼어붙은 바다(The North Water), 이언 맥과이어, 정병선, 열린책들, e

▷ 1859년, 영국 헐 - 바다 - 북극

브라운 리 선장이 지휘하는 포경선 '볼런티어 호'는 일등 항해사 캐번디시, 작살수 헨리 드랙스, 선박의 패트릭 섬너 등 선원들을 태우고 북쪽으로 떠난다. 바다표범과 고래를 잡으며 항해를 이어가던 어느 날 선박 위에서 강간 및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진범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선장마저 목숨을 잃고 만다. 죽은 선장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일등 항해서 캐번디시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더 북쪽으로 갈 것을 종용한다. 볼런티어 호에는 더 이상 고래잡이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선주의 또다른 음모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도입부부터 폭행, 살인, 아동 강간 등 몹시 무자비하고 불편한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일단 펼치고 나면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다 읽어버렸다. 곧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되는 이야기 진행인데, 섬너가 북극에서 혼자 떨어졌을 때 곰을 죽이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다가 잠드는 모습을 보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열연한 영화 '레버넌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연일 35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오싹한 공포와 추위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잠시나마 마음과 몸을 서늘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오해합니다. 허영심에 눈이 멀어 어리석지요. 우리는 온기를 얻으려고 모닥불을 피워요. 그러고는 불평을 합니다. 너무 뜨겁고, 맹렬하다고. 연기 때문에 눈이 맵다고.


3. 제인 에어(Jane Eyre), 샬럿 브론테, 유종호, 민음사 

▷ 1800년대 중반, 영국

어쩌다 보니 18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연달아 읽는다. 21세기에 쓰여진 『얼어붙은 바다』가 과거 상황에 대한 충실한 자료 조사를 통한 디테일 묘사로 칭찬을 받았다면(가디언지), 여성이 소설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편견 속에서 비난을 받기 쉬웠던 시절, 19세기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미래지향적인, 뜨거운 열정과 독립적인 자의식을 지닌 여성의 사랑과 삶을 그린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나 역시 이 유명한 고전을 왜 이제야 읽기 시작했을까 싶었을 정도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그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부조리한 상황에서 할말 다 하고 똑부러지게 행동하는 제인이 정말 멋있게 느껴졌고 말이다. 다만 결말이 조금 아쉽다. 로체스터의 거짓을 알고 난 뒤 주저 없이 손필드 저택을 나가는 제인의 모습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는데, 왜 다시 돌아가야했을까. 스무살이나 많은 데다가 제인과 사기 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우는 사촌오빠 세인트존보다야 낫다지만, 제인이 말하는 그 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해본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I remembered that the real world was wide, and that a varied field of hopes and fears, of sensations and excitements, awaited those who had courage to go forth into its expanse, to seek real knowledge of life amidst its perils. (chapter 10)
나는 실제 세계는 넓고 넓으며 희망과 두려움, 감동과 흥분 등의 다양한 영역이 그리고 들어가 위험 가운에서 삶의 참된 지식을 찾으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1권 p.151)


4.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 진 리스, 윤정길, 펭귄클래식코리아

▷ 1830년대, 자메이카

버사는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 거예요(p.183)'라고 했다. 『제인 에어』의 남자주인공 로체스터에게는 숨겨진 아내가 있다. 제인을 향한 로체스터의 변명에 따르면 유전인 광기를 속이고 로체스터와 결혼하였으며, 결혼 후에도 술과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미치고 만 몹시 부정한 여인이다. 그런 까닭에 로체스터의 영지인 손필드 저책 3층에 감금해 두었다고. 『제인 에어』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던 '버사 메이슨'은 진 리스의 손끝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앙투아네트 코즈웨이.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영국인, 즉 크리올이다. 물려받을 작위도 재산도 없던 로체스터는 오로지 '돈' 때문에 지참금을 노리고 자메이카로 건너와 상속녀인 앙투아네트와 결혼을 한다.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를 사랑하나, 삼만 파운드에 영혼을 팔았다는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를 사랑하지 않았다. 크리올을 비하하고 자메이카의 대자연 속에서 자라나 자유로운 생명력이 넘치는 앙투아네트를 헤프게 생각한다. 그는 재산뿐만 아니라 앙투아네트의 이름과 영혼을 빼앗고 '버사'라는 이름을 붙여 그녀를 광기로 몰고 간다. 로체스터는 『제인 에어』에서도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고 나니 그 찌질함과 비열함 때문에 더욱 싫어졌다. 아무튼 『제인 에어』를 읽을 때에는 꼭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같이 읽기를 추천한다. 

그 노래가 흰 바퀴벌레에 관한 거예요. 나를 말하는 거죠. 그게 이곳 사람들이 대농장을 경영하던 우리 백인 모두를 부르는 이름이에요. 그들 종족이 아프리카에서 그네들을 노예상인들에게 팔아먹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우리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라고요. 영국 여자들이 우리를 백색 검둥이라고 부르는 것도 들어왔어요. 그러니 당신들과 이곳 유색인종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누구며, 어디가 내 나라인지,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내가 왜 태어난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아요.(p.149)


5. 구르브 연락 없다(Sin noticias de Gurb), 에두아르도 멘도사, 정창, 민음사

▷ 1990년대 초반, 에스파냐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두 외계인(이름없는 '나'와 구르브)이 에스파냐에 착륙한다. 생김새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특성을 이용하여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서이다. 탐사를 떠난 동료 구르브와 연락이 두절되자, 혼자 남은 '나'는 에스파냐의 유명 인사들로 몸을 바꾸며 구르브를 찾아 바르셀로나 일대를 헤맨다. 그와중에 거처였던 우주선이 고장나고, 구르브가 있어야 수리가 가능한지라, '나'는 은행 계좌를 조작하여 마련한 돈으로 아파트를 구하고 본격적인 지구 생활을 시작한다. 친구도 사귀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긴다. 이름없는 외계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바르셀로나는 때로는 부조리하고, 때로는 들떠 있으며, 때로는 매우 유쾌하다. 외계인의 눈에 비친 지구의 삶은 불편하고 지저분하고 복잡하다. 이렇게 보면 마치 비판하기 위해 쓴 글 같지만 한결 같이 바르셀로나의 먹거리와 명소, 역사적 사건 등을 세밀하게 훓고 있기에 작가의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을 가득 느낄 수 있다. 내가 에스파냐에 대해 좀 더 잘 알았더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듯하다. 읽는 내내 바르셀로나에 가서 추로를 먹고 싶어지는 건 덤이다.


6.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We should all be feminists),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김명남, 창비

▷ 현재

책 크기도 작은 편이고 100면도 채 되지 않는다. 스웨덴 청소년의 성평등 교육 필독서라고 적혀 있는데 우리나라 청소년도 반드시 읽었으면 좋겠다. 페미니즘 입문서 중 제일 괜찮다. 짧지만 매우 명쾌하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어째서 우리가 페미니스트여야 하는지 알려준다.


7. 콜레라 시대의 사랑(El amor en los tiempos del cólera),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민음사 

▷ 1800년대 후반 - 1930년대, 콜롬비아 카리브 해의 이름 없는 마을

페르미나 다사의 남편인 후베날 우르비노가 사망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기 위해 51년 9개월을 기다린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후베날의 장례식날 페르미나에게 다시금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맹세한다. 이야기는 52년 전으로 돌아가 열일곱 소년 플로렌티노와 열세 살 소녀 페르미나의 첫만남으로 시작되는 긴 여정을 보여준다. 2년 동안 편지로 사랑을 주고받던 페르미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플로렌티노와 헤어지고, 열 살은 더 먹은 의사 후베날 우르비노와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한다. 하지만 유럽으로 행복한 신혼여행을 다녀온 페르미나는 '별것 없더라고요(1권).'라고 한다. 유명한 의사의 아내로서 상류층 여인의 특권을 누리지만 항상 남편이 빌려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끼며 그저 안정을 위해 정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한편 플로렌티노는 후베날이 죽을 때까지 첫사랑을 기다리겠다고 마음 먹은 후 수많은 여성들과 그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며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부족하지 않은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플로렌티노가 사랑을 나누는 여성들이 대게 다 주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좋다. 끝끝내 페르미나와 플로렌티노는 다시 하나가 된다. 첫사랑을 위해 52년이나 기다리고 그 사랑을 다시 이룬다는 줄거리는 매우 환상적이고 낭만적으로만 들리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긴 이야기는 그 기다림 속의 지난한 현실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코 환상적이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내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사랑하는 이유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별것이 맞다고 나를 설득해주기 때문이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소녀는 눈을 들어 창밖으로 누가 지나가는지 쳐다보았다. 그 우연한 시선은 오십 년이 지난 후에도 끝나지 않고 세상을 뒤흔든 사랑의 시작이었다.(1권 p.99)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나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2권 p.331)



※ ∪: J와 함께 읽은 책(MAGNET), 水: 격주 수요일 책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눈 책, 小: 소소북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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