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가 너무 더우니 아무런 의욕이 없어서 가만히 앉아 책장만 넘긴다.

01. 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Nocturnes), 가즈오 이시구로, 김남주, 민음사 小, pop

▷ 1900년대 후반. 이탈리아 베네치아, 영국 런던, 영국 말번힐스, 미국 할리우드

두 번째 만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이다. 몇 해 전 『남아 있는 나날』로 가즈오 이시구로와 처음 만났는데, 지금에서야 이유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나와 맞지 않다고 여겼고 그 뒤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고 보면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도 영화만 보고 원작 소설은 안 읽었네. 조만간 시도해야겠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작년 노벨상 수상 이후. 내게 괜찮은 책 추천해 주기를 즐겨했던 지인 D가 다른 작품은 몰라도 이 책은 꼭 읽어보라며 가즈오 이시구로의 『녹턴』을 내 품에 안겼다. 언젠가는 읽겠지 했는데, 로베르토 볼라뇨의 장편 『2666』을 읽느라 조금 지친 내 눈에 화사한 모던클래식 시리즈가 들어왔다. 
베네치아의 한 운하 곤돌라 위에서는 한물간 크루너 가수의 아내에게 바치는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고, 런던의 한 플랫에서는 중년의 대학 동창들이 모여 학창 시절 자신들을 매료했던 음악을 추억하며 춤을 춘다. 영국 말번힐스에서는 재능은 있지만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미국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는 외모 때문에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겨 성형 수술을 선택한 섹소포니스트의 음반이 돌아간다.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광장에서 원하지 않는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야기는 짧고 밋밋하지만 사랑과 소통, 실패와 희망 등의 인생과 음악을 절묘하게 버무려서 가슴에 은근하게 스며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아, 이래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는 건가. 몇 작품 더 도전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어머니가 출구를 찾지 못한 건 가슴 아픈 일이오. 나는 나의 린디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소. 그렇소, 나의 린디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오. 나는 나의 린디가 출구를 찾길 바란다오.(p.43 크루너)


02.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민음사, e 

▷ 현대. 한국

세상에, 우리나라에 이렇게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판타지 소설이 있다니. 39도를 넘나드는 서울의 불볕 더위 속에서 상큼한 레몬 같은 소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특유의 노란장판 감성이나 우울하고 답답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아서 아주 좋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만도 않다. 작가님, 앞으로도 이런 글 많이 써 주세요. 주인공은 사립 M고의 보건교사 안은영.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봤으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악귀와 혼령을 물리친다. 등장인물의 설명만 보면 몹시 음침하게 느껴지는데 안은영은 무척 다정하고 발랄하다. 나쁜 혼이 아닐 때는 따뜻하게 감싸주거니와 학생들에게는 늘 좋은 상담자이자 선생이다. M고의 한문 교사이자 학교 설립자의 후손인 홍인표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에너지가 안은영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조력자가 되어 준다. 안은영 홍인표 콤비의 동료애가 마음에 들어서 결말은 좀 아쉽기도 했다.

폭력이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맥상통하는 것이구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애초에 처음 한두 번을 용인해 주지 말았어야, 유야무야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을 문제였다.


03.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구호, 민음사 小, pop

▷ 1900년대 중반. 콜롬비아 바닷가 작은 마을

산띠아고 나사르에게 순결을 빼앗긴 앙헬라 비까리오. 그 때문에 결혼식 첫날밤 남편에게 소박 맞고 친정으로 쫓겨나자, 앙헬라의 쌍둥이 오빠들은 가족의 명예를 위해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집을 나선다. 쌍둥이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범행 예고를 하지만 그들을 저지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산띠아고에게 경고해 주지 않는다. 여성의 '순결'이 명예로 치환되는 상황도 슬프기 짝이 없는데(이 소설은 실화 기반이며, 여전히 많은 사람이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한다), 과연 명예를 위한 폭력은 정당한 것일까. 마을 사람들 대부분 살인을 막을 수 있었지만 '명예'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과 '생명'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불운한 우연과 우연이 겹쳐 산띠아고는 끝내 집 대문 앞에서 쌍둥이 손에 죽고 만다. 사건 후 27년이 지나고, 화자(작가)는 당시 마을에 있던 화자 자신의 기억, 사건 보고서, 여러 사람의 증언 등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마르케스의 소설치고는 아주 짧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는 매우 묵직하다.

어느 날 새벽의 수탉 소리에 우리는 불현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p.123)


04. 토요일(Saturday), 이언 매큐언, 이민아, 문학동네 

▷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영국 런던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이른 아침, 신경외과 의사 헨리 퍼론은 여유로운 주말을 시작한다.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동료와 스쿼시 게임을 하고, 장을 보고, 요양 시설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고, 아들의 공연을 보고,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한다. 평범하기 이를 바 없다. 한편 집 바깥에서는 불 붙은 화물 수송기가 시내를 가로지르며 히드로 공항으로 추락하고(다행히 테러는 아니었다),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진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일상을 끈질기게 따라가며, 그 틈 사이로 이라크와의 전쟁, 고문, 테러 등 비일상적 이미지를 절묘하게 섞은 이언 매큐언의 필력에 종일 감탄하며 읽었다. 헨리 퍼론의 주말은 가족 식사와 함께 완벽하게 끝날 것 같았지만, 오전에 도로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건달들이 퇴근하는 아내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이를 통해 언제든 야기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불안과 위험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전후무후한 더위 탓에 온 거리에 긴장감이 팽배한 요즘과 몹시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데이지의 필독 목록에서 퍼론이 깨달은 것은 초자연주의란 불충분한 상상력의 소산이자 직무유기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나 경이로움을 '그럴싸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를 회피하는 어리광일 뿐이다. (중략)

"이런 바보" 데이지는 엽서로 호통쳤다. "그래드그라인드(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등장인물)가 따로 없네요. 이건 문학이지 물리학이 아니라고요."(pp.115-116)


05. 현기증, 감정들(Schwindel.Gefuhle), W.G.제발트, 배수아, 문학동네

▷ 1800년대 초반. 이탈리아, 1980년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1910년대. 오스트리아, 1980년대. 오스트리아

때때로 어떤 책을 만나면 큰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감정을 그토록 뒤흔드는 것인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다. 제발트가 화자 '나'의 입을 빌린 이 말은 여행을 다닐 때도 공감하지만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제발트의 책이 딱 그렇다. 6년 전 『토성의 고리』로 제발트의 글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읽은 『이민자들』, 『아우스터리츠』, 『현기증, 감정들』. 모두 다 그랬다. 백 퍼센트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건만 나를 자꾸 붙잡는다. 알지 못할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장황한데 섬세하고 아름답다. 몇 번 더 읽으면 행간도 다 읽어낼 수 있겠지, 라고 막연하게 기대한다. 주의(※).『현기증, 감정들』을 다시 읽을 때는 꼭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를 먼저 읽을 것(솔출판사에서 카프카 전집을 이북으로도 내줬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이 있다). 뜨거운 한낮 열기에 지쳐 주말 내내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제발트의 글을 읽고 나니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때때로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광경을 마주하면 큰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감정을 그토록 뒤흔드는 것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p.167 귀향)


06.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 에밀리 브론테, 유명숙, 을유문화사

▷ 1700년대 후반 ~ 1800년대 중반. 영국

지난달에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읽었더니 당연스럽게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도 읽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언쇼의 광적이고 뒤틀린 사랑과 '워더링 하이츠'의 언쇼 가문,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린턴 가문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집요하고도 치열한 복수를 담은 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히스클리프가 죽기 직전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세입자로 들어온 록우드 씨에게 캐서린 언쇼의 유모의 딸이자 소꿉친구(자라서는 그 집안의 가정부가 되었다)였던 넬리 딘이 워더링 하이츠와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두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는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넬리가 어찌나 입담 좋은 이야기꾼인지 새벽 한 시까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 록우드 씨뿐만 아니라 나까지 술술 빨려 들어갔다. 안쓰럽다가도 복수에 미쳐 아내(이사벨라 린턴)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질게 학대하는 히스클리프에게는 완전히 질려 버렸지만, 저세상에서나마 캐서린과 못다 한 사랑 이루기를. 히스클리프가 죽고 난 뒤, 워더링 하이츠와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는 다시 원래 가문의 자손인 캐서린 린턴(캐서린 언쇼와 에드거 린턴의 딸), 헤어튼 언쇼(힌들리 언쇼와 프란시스의 아들)의 손에 들어간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 속에서 정신을 못차리다가, 캐서린 린턴이 히스클리프 탓에 글을 못 배운 헤어튼에게 글을 가르쳐 주면서 애정을 쌓는 모습을 보니 너무 귀여워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살아오는 동안 내 생각의 가장 큰 몫이 바로 히스클리프였어. 모든 것이 소멸해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해.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있되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낯선 곳이 되고 말 거야. 내가 그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거야. 린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나무 아래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있어.(pp.131-132)


07. 동급생(Reunion), 프레디 울만, 황보석, 열린책들

▷ 193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워더링 하이츠』를 다 읽고 나서 다음 책을 고르던 중 몇 페이지만 볼까 하고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읽는데 한 시간도 채 안 걸린 140면 남짓한 이야기는 히들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아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던 시기, 유서 깊은 독일 명문가의 자제인 그라프 폰 호엔펠스 콘라딘과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의 우정을 다룬다. 콘라딘이 전학을 온 후 둘도 없는 친구가 되면서 함께 여행을 가고,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고, 서로 수집품을 보여주고, 가끔은 여자애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아가지만 시대는 끝내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만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응원하다가, 그들의 이별에 슬퍼하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소설의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 덕분에라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p.21)


08. 그것(IT) 삼부작, 스티븐 킹, 정진영, 황금가지, e

▷ 1957년~1985년. 미국

하여간에 그 몹쓸 호기심이 일을 크게 만든다. '그것'과의 첫만남은 작년 9월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의 『그것(IT)』이 개봉했을 때다. 호러 영화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삶을 살다가 관심이 있던 배우 빌 스카스가드(Bill Skarsgård)가 삐에로 분장을 하고 나온다기에 궁금해졌다. 인터넷에서 삐에로가 '빌 스카스가드'인 걸 알고 보면 덜 무섭다고 하는 글을 몇 개 보고 극장에 갔다가 말 그대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하필 극장에 사람도 많지 않은 바람에, 중간 즈음에 앉은 내 옆과 내 앞으로 아무도 없어서 더 오싹했다. 그렇게 끝냈으면 참 좋았을 것을. 영화가 시리즈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무려 종이책 기준 약 1800면에 달하는 책에는 '그것'과 배경도시인 '데리'의 역사와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고 하기에 책도 궁금해졌다. 게다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글발 좋은 스티븐 킹의 작품 아니던가. 지인 D에게 한참 '스티븐 킹 찬양'을 듣고 있던 때라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인 2018년 8월. '그것: 챕터2(It: Chapter Two)' 촬영 사진을 구경하다가 생각난 김에 이북을 열었고, 킹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독자를 끌고 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흡인력이 대단하다.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삐에로와 괴물들 분장이 무섭고 징그러웠다면, 책에서는 인간들의 악행이 끔찍하고 두렵다. 특히 헨리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하고, 비벌리의 핵폐기물급 쓰레기 전남편이 데리까지 쫓아갔을 때는 그 두 사람이 언제 비벌리와 친구들 앞에 나타나서 염병을 떨까 걱정되어 3권을 읽는 내내 지나치게 긴장했다. 글에 날것 그대로 만연한 폭력에 진이 다 빠지는데 몰입도는 끝내줘서 어렵게 멈추기를 수차례. 그 사이사이 다른 책도 읽었으나, 데리라는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그것'에게 다시 끌려가 책을 다 읽는 데는 일주일도 채 안 걸렸다. 과연 킹은 괜히 킹이 아니다. 흥미진진했지만, 그 덕분에 심적으로는 너무 힘든 일주일이었다.

나는 『반지의 제왕』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가 "길은 길로 이어진다."고 말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 집 현관을 나와 보도로 접어들고, 그래서 결국에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길이 아니라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훨씬 환상적인 길 말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모르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에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목소리일지 모른다.(2권)


09. 젊은 베르터의 고뇌(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임홍배, 창비

▷ 1771년 5월 4일~12월 24일. 독일

토마스 만의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기에 앞서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다시 꺼냈다. 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임을 알자 로테와 그의 약혼자 알베르트 곁에서 떠나지만 신분차별의 사회 속에서 귀족들에게 치욕적인 수모를 겪고, 다시 로테와 알베르트의 의 곁으로 돌아온다. 사랑하면 안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에 절망감은 더욱 커지고, 베르터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불륜 관계가 아주 흔한 세상에서 베르터는 지나치게 순수했고 양심적이었다. 짧지만 언제 읽어도 강렬하다.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열렬히 사랑해 봤다는 것이 참 부럽다.

나는 로테와 작별을 하면서 오늘 중에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승낙했고, 나는 돌아왔다. 그후로도 해와 달과 별들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겠지만, 나는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았고, 내 주위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p.45)


10. 누런 개(Le Chien Jaune), 조르주 심농, 임호경, 열린책들, e

▷ 1900년대 중반. 프랑스 콩카르노

브르타뉴의 항구 도시 콩카르노의 라미랄 호텔 앞에서 모스타구엔 씨가 총에 맞는다. 호텔 카페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가는 길, 바람을 피해 담뱃불을 붙이려 잠깐 멈춰 섰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스타구엔 씨의 곁에는 떠돌이로 보이는 누런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지역 유지인 모스타구엔 씨와 친구들을 둘러싸고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 사방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앞다투어 기사를 쓰는 바람에 작은 도시는 공황에 빠진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눈에 띄는 누런 개에게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고 급기야 총까지 쏜다. 작은 마을에 공포심이 스며들고, 그것이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표출되는지 날카롭게 묘사했다. 기존 읽었던 작품처럼 사건이 터지고 그것만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연쇄적으로 사건이 발생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더욱 긴장감이 넘친다. 


11.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La familia de Pascual Duarte), 카밀로 호세 셀라, 정동섭, 민음사

▷ 1900년대 초. 스페인

교수형을 앞둔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쓴 회고록 형태의 글이다. 파스쿠알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폭행과 폭언에 노출되어 무자비한 학대를 받으며 자란다. 아버지는 미친개에 물려 죽고, 여동생은 돈을 훔쳐 가출하며, 남동생은 기름통에 빠져 죽는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삶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하지 않다. 파스쿠알은 술집에서 사람을 칼로 찌른다. 하지만 피해자가 죽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런 제재도, 처벌도 받지 않는다. 죄의식조차 느낄 틈이 없던 파스쿠알은 끝내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살인죄는 중범죄인데도 형량을 크게 감면 받아 3년만 살고 나온다. 우리나라도 요즘 강간(특히 미성년자) 혹은 살인 같은 중범죄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해서 문제인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세상이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파스쿠알은 두 번째 가정을 꾸리지만 끊이지 않는 어머니의 폭언에 어머니마저 살해한다. 친족 살인에도 형은 그리 길지 않았고, 다시 사회에 나온 파스쿠알은 재차 저지른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작가는 파스쿠알의 인생을 통해 일상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그 폭력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파스쿠알은 늘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겠다는 강박이 생긴다. 공포가 인간 내면에 잠재된 공격성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머니를 향한 파스쿠알의 칼부림은 스페인 내전(1936-1939) 이후 억압과 혼돈으로 가득했던 사회를 향한 몸짓이 아니었을는지.
스티븐 킹의 『그것』 이후로 폭력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은 좀 쉬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나의 그 몹쓸 호기심이 또 발동하는 바람에 새로운 작가를 만났다. 노벨문학상(1989)도 받은 작가의 이력이 흥미롭다. 내전 당시 반정부군 편에서 싸웠으나, 반정부군 득세 이후 내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금지된 사회에서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1942)』을 써서 출판 금지 조치를 받는다. 전체주의에 대한 반기이다. 이 작가가 쓴 『벌집』도 조만간 읽어 봐야지.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어서 작가 해설을 읽다 말고 헤밍웨이가 특파원 입장에서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참전 이후 조지 오웰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세상에는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읽고 싶은 것도 많다.

우리 모든 인간은 매한가지 가죽을 쓰고 태어나지만, 우리가 성장할 때 운명은 마치 우리를 밀랍 인형 다루듯 주물러 대고 또 여러 오솔길을 통해 죽음이라는 동일한 종말로 향하게 하면서 즐거워하지요. 꽃길로 가도록 운명 지어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엉겅퀴와 선인장 가시밭길에 던져진 자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야 주위의 차분한 시선을 즐기며 순진한 얼굴로 자신들의 행복의 향기에 미소 짓습니다만, 다른 이들은 광야의 뙤약볕을 견디며 자기 몸을 보호하려는 야생 짐승처럼 눈살을 찌푸리지요. 화장품과 향수로 몸을 가꾸며 사는 것과 나중에 아무도 지울 수 없는 문신을 하고 사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p.25)


12. 잃어버린 거리(Quartier Perdu),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문학동네, e

▷ 1980년대. 프랑스 파리

튈르리 공원, 콩코르드 광장, 루아얄 다리, 트로카데로 광장, 센 강,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에펠탑, 앵발리드……. 파리 곳곳을 훑는 장 데케르의 시선을 쫓아 나도 다시 파리로 떠나고 싶어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고작 두 달 지났을 뿐인데도 왜 이렇게 아득하게 느껴질까. 바게뜨와 진한 쇼콜라쇼, 밤이면 항상 내 시선의 끝이었던 반짝이는 에펠탑이 그립다. 주인공 장 데케르는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추리소설 작가이다. 그가 쓴 시리즈물은 큰 인기를 얻었고, 그는 드라마 제작 판권 계약을 맺기 위해 20년만에 파리를 찾는다. 공항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가 낯설고,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사가 프랑스어를 말을 걸까봐 겁을 낸다. 하지만 막상 파리 시내로 들어온 그에게 파리는 전혀 낯선 공간이 아니다. 스무 해가 지났어도 장 데케르는 여전히 도시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릴 적 가지고 있던 남색 표지의 프랑스 여권처럼 파리는 또렷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편집자를 만나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문득 자신이 스무 살 때까지 파리에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편집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며칠 더 머물기로 마음 먹는다. 20년 전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장 데케르는 도망치듯,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파리를 떠나야만 했는지, 그는 도시 곳곳을 누비며 잊으려고 애썼던 기억을 되살린다. 묻어둘 수는 있어도 소멸되지는 않는다. 추리 요소가 다분하지만 범죄자가 아닌 '나'를 찾는 오롯한 여정. 구체적이면서도 아련하고 모호해서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파트릭의 글이 참 좋다.

인생이란 앞뒤로 이어진 여러 주기들의 연속이랄까요…… 그래서 이따금 '출발점'으로 되돌아와보기도 하지요. 파리에 돌아오면서부터 이제 앰브로즈 가이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에요.


13. 퍼니걸(Funny girl), 닉 혼비, 오득주, 폭스코너, e

▷ 1960년대/2014년. 영국 블랙풀 - 런던

고향에서 미스 블랙풀 당선 직전에 수상을 포기하고 코미디언이라는 꿈을 좇아 런던으로 상경한 바바라(소피 스트로)의 이야기이다. 간신히 발을 들여놓은 쇼비즈니스 업계에서 예쁘고 몸매가 좋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그 시대 요구되던 정형화된 역할임을 알고 좌절도 하지만, 코미디에 대한 열정과 당돌함으로 소피는 자신이 주인공이 될 기회를 잡고 만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지만 성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토니와 동성애에 대한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그 중심에 서고 싶은 야심찬 게이 빌 작가 콤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미남 배우 클라이브, BBC라는 조직에 충성해야 하지만 코미디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프로듀서 데니스. 바바라와 이 네 명으로 이루어진 팀의 시트콤 제작기이다. 빤한 이야기로도 보이지만, 소피뿐만 아니라 함께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무척 매력적인 데다가 닉 혼비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소설 속에 잘 녹아 있어서, 오랜만에 깔깔대며 글을 읽었다. 비틀즈, 롤링스톤즈, 트위기 등 시대의 아이콘들을 만들어 냈던 영국 대중문화의 융성기, 역동적이고 활기가 넘쳤던 1960년 런던으로의 여행은 무척 유쾌하고 사랑스러웠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작가들이란 결코 어디에서도 소속된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토니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작가가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들로 가득한 파티에서조차 소속감을 갖는 데 실패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14. 벨 자(The Bell Jar), 실비아 플라스, 공경희, 마음산책

▷ 1950년대. 미국 뉴욕 - 보스턴

한적하고 보수적인 미국 지방에서 우수생으로 자란 에스더는 열아홉 살 때 유명 잡지인 <레이디스 데이>의 공모전에 당선되어 한 달 동안 뉴욕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유명한 패션 잡지의 최고 편집자에게 일을 배운다는 포부를 품고 뉴욕으로 오지만, 정작 뉴욕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빛날 미래도, 보장된 커리어도 아닌 부조리한 사회 속에 자리한 자신의 혼란스러움이다.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속기를 배워 엄마가 원하는 모범적인 미국 여성으로서 살아갈 자신도 없고, 비겁한 버디 윌러드와 결혼하여 의사 부인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 마음도 없다. 여름 학기의 글쓰기 강좌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지원자 과정에서 탈락한다. 삶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감, 답답함은 에스더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에스더는 그만 자살을 기도한다. 정신 요양원에 갇힌 에스더는 그곳의 다른 여성들을 보면서 다들 '벨 자(종 모양의 유리 덮개)' 밑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뿐만 아니라 에스더가 돌아갈 대학의 여학생들마저도. 모든 것이 허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리병에 갇힌 삶이다. 무서운 것은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났는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목소리는 커졌지만 그 변화는 여전히 너무 더디며, 기득권자들의 거부 반응이 몹시 심하다. 내가 속한 사회는 특히나 더 더뎌서, 근래에 현실에서 '여성의 정조가 생명보다 중하다'라는 표현을 접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읽는 내내 에스더의 고통스러운 속내가 절규처럼 들려와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순결을 지키다가 순결한 남자와 결혼하는 게 좋을지 몰라도, 결혼 후에 갑자기 남자가 버드 윌러드처럼 순결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면 어떨까? 여자는 순결한 삶만 살아야 하는데 남자는 순결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 두 가지를 산다는 생각은 참을 수가 없었다. (p.112)


15. 눈먼 암살자(The Blind Assassin), 마거릿 애트우드, 차은정, 민음사

▷ 1900년대 초반. 캐나다

여동생인 로라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80대 노부인 아이리스의 회고록, 로라의 이름으로 사후 출간된 상류층 여성과 도망 중인 공산주의자의 사랑을 그린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 「눈먼 암살자」 속 남성이 여성에게 들려주는 공상 과학 이야기. 이 세 이야기가 한 가지 진실을 향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인 삼층 액자 구조 소설이다. 그 진실에는 1차 세계 대전, 대공황, 스페인 내전 등 국내외 정세에 따른 상류층 집안의 흥망성쇠와 집안을 이끄는 남성들의 추저분한 욕망에 희생된 아이리스와 로라 자매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이리스의 회고록과 소설 속 소설인 「눈먼 암살자」 사이사이에 캐나다 유력 언론지의 기사나 논평을 실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했고, 허구와 사실 그 모호한 경계에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삼중으로 얽히고 설킨 구조라 시공간이 들쑥날쑥한 데다가 아이리스의 회고록마저 과거와 현재, 토론토와 포트타이콘드로가(가상 지역)를 쉴 새 없이 오가는 터라 초반에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조금 벅찼다. 허나 그 흐름을 잡고 나니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결국 앉은자리에서 찐득하게 1, 2권을 다 읽고 말았다. 격변의 시대 속에서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아이리스는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복수에 성공한다. 빤한 이야기를 빤하지 않게 만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손끝이 좋다. 『시녀 이야기』 이후 두 번째 만나는 작품인데 『눈먼 암살자』 역시 매우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도 틈틈히 그녀의 작품을 찾아볼 것 같다. 

이론상으로는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나는 중심가, 번화한 곳만을 고수했다. 그런 한정된 곳 내에서도 구속력이 느껴지지 않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을. 그들은 결혼을 했는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직업은 있는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신발 가격 외에는 별다른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2권 p.75)

네 아버지는, 글쎄, 하늘만이 그 가능성의 한계가 되겠지. 부자, 가난뱅이, 거지, 성자, 수십 개의 출신 국가, 수십 개의 취소된 지도, 수백 개의 파괴된 마을들.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는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2권 pp.382-383)


16. 유령 퇴장(Exit ghost), 필립 로스, 박범수, 문학동네

▷ 2004년. 미국 뉴욕

2004년 10월 말, 일흔한 살의 노작가 네이선 주커먼은 은둔해 있던 버크셔 산골을 떠나 11년만에 뉴욕으로 돌아온다. 9년 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발기부전과 요실금을 앓게 된 주커먼은 요실금을 치료하기 위해 잠깐 들른 것이었는데, 우연히 신문에서 뉴욕의 아파트와 조용한 시골집을 1년 동안 교환하기를 원한다는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연락을 한다. 집을 교환하기로 한 빌리와 제이미 부부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커먼은 마흔 살이나 어린 제이미에게 매력을 느낀다. 자신이 발기부전인 것도 알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커먼은 정신 나간 열망을 놓지 못하고, 급기야 그녀와의 가상 대화로 희곡까지 쓴다. 한편, 주커먼은 제이미의 친구라는 젊은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프리랜서 기자인 클리먼은 주커먼이 숭배했던 작가 E.I.로노프의 전기를 집필 중이라며 주커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세상을 뜬 지 40년이 넘었고, 살아 있을 때에도 철저히 운둔했던 작가의 사생활을 폭로하겠다는 클리먼의 무례함에 냉대하지만 젊고 열의 넘치는 그는 집요하다. 주커먼과 클리먼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비윤리적 문학이냐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한 윤리적 문학이냐를 두고 대립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와는 상관없이 주커먼은 패배하고 만다. 나이 들고 병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도 무모할 때가 있다. 나이 먹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찾아오며, 퇴장을 결심해야 하는 그 시간에는 너무나도 큰 서글픔이 뒤따른다. 필립 로스의 글은 항상 냉혹해서 아름답다.

그렇다면 내 "근친상간"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실수 탓에 모범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게  될까? 나의 엄청난, 추악하 비밀. 분명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또한 놀라운 일은 그때까지 쌓아온 누군가의 훌륭한 기량과 업적이 전기 집필을 위한 조사라는 징벌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p.358)


17.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Lotte in Weimar), 토마스 만, 임홍배, 창비

▷ 1816년. 독일 바이마르

1816년 9월 로테는 바이마르 궁정에 재직 중인 리델과 결혼하는 바람에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내야 했던 여동생을 방문하기 위해 바이마르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괴테의 점심 초대를 받았고, 두 사람은 작별한지 44년만에 다시 만난다. 괴테와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그' 주인공이 44년만에 다시 만나다니, 라고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사랑하는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엄청 대단하게 여겨질 일이건만 괴테가 남긴 기록은 '1816년 9월 25일. 리델 가족, 케스트너 부인과 함께 점심 식사'라고 적은 메모뿐. 로테가 남긴 기록을 보아도 괴테는 뻣뻣하고 의례적인 대응을 했다고 하니, 대형 떡밥이 우르르 쏟아져야 할 빅 이벤트가 시시하기 짝이 없다. 당사자들에게도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로테와 괴테의 재회를 두고 토마스 만은 무려 우리책 기준 550면이라는 긴 이야기로 풀어낸다.
바이마르를 찾아 엘리판트 호텔에 묵게 된 샤를로테 케스트너 부인에게 손님이 찾아온다. 로테에 대한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는 수석 웨이터 마거,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찾아온 영국 출신 로즈 커즐, 괴테를 존경하면서도 자신의 지식을 착취하는 괴테를 원망하며 괴테의 조수로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괴테의 비서 겸 수행원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머 박사, 절친한 여자 친구인 오틸리에가 괴테를 숭배한 나머지 자신에 비해 월등이 모자라고 주색잡기에 빠져 방종한 생활을 하는 아우구스트와 결혼하려고 하니 막아달라고 호소하러 찾아온 아델레 쇼펜하우스, (오틸리에 말하길 자신은 아우구스트한테 씐 마성을 몰아낼 구원의 여성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에 그와 결혼해야 한다니, 이를 반대하는 아델레는 참으로 현명하다), 괴테의 근황을 전하고 로테 일행을 점심식사에 초대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아우구스트. 로테는 자신을 보기 위해 무작정 찾아온 손님들을 내치지 않고 너그러이 맞아 이야기를 들어준다. 등장인물마다 어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로 묶인 대사가 몇 페이지씩 이어지는데 반절 이상이 인간 괴테와 그의 문학에 관한 이야기인 걸 보면 새삼 토마스 만의 괴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감히 토마스 만에게 팬픽 계의 최고봉, 팬픽 계의 거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원망이나 비판도 서슴치 않는데 그 부분마저 괴테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드러나서 읽는 재미가 있다.

구름이 형성되면서 형태가 바뀐다 해도 결국 똑같은 구름이 아니던가? 신의 이름이 수백개지만 결국 오직 유일자를 가리키고, 신이 사랑하는 자식들, 그대들을 가리키잖아? 인생은 형태의 변화일 뿐이고, 수많은 존재들 속에서도 통일성이 유지되고,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는 것이지. 그런즉 당신과 그 여성, 그대들 모두는 나의 사랑 안에서는 유일자야. (p.533)


18. 아우라(Aura), 카를로스 푸엔테스, 송상기, 민음사

▷ 1960년대 초반. 멕시코 멕시코시티

주인공 펠리페 몬테로는 신문기사에서 자신에게 딱 맞는 일자리를 발견한다. 펠리페가 일을 하기 위해 찾아간 저택에서 늙고 추한 콘수엘로 부인과 아름다운 여인 아우라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정원에서는 고양이들이 불타고 아우라는 양의 목을 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호러와 로맨스가 기이하게 결합되어 있다. 비밀의 진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보니 더 '뭐지? 뭐지?' 하면서 빠져든다. 심지어 이 소설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이인칭 화법을 사용해서, 읽는 내내 화자가 말하는 '너'가 꼭 나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자연스레 펠리페에게 감정이 이입되고, 그의 욕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60면 남짓한 매우 짧은 소설이지만 카를로스 푸엔테스라는 작가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후반부에 실린 소설만큼 긴 <나 자신을 읽고 쓰기에 관하여 - 나는 『아우라를 어떻게 썼는가』>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드디어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 안에서 너는 거품을 일으키는 초록빛 바다를 발견해. 그 눈망울들을 바라보며 넌 꿈이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여. 여태까지 보아 온, 그리고 앞으로도 볼 수 있는 그저 아름다운 초록빛 눈일 뿐이라고 말이야. 그런데도 끊임없이 출렁이며 변화하는 이 눈은 오직 너만이 알아볼 수 있고 열망하는 그 어떤 풍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어. (pp.19-20)


19.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 프랑수아즈 사강, 김남주, 민음사

▷ 1950년대. 프랑스 파리

주인공 폴은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연인 로제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지만, 구속을 싫어하는 로제는 바람을 피우며 자기 마음 내킬 때만 폴을 만난다. 폴은 어느 날 실내 장식 일을 하기 위해 방문한 집에서 시몽이라는 청년을 만난다. 시몽은 폴에게 한눈에 반해 애정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고, 로제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에 지친 폴은 젊고 잘생긴(영앤핸섬 최고) 시몽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폴에게 새로운 남성이 등장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로제와 적극적이고 열정 넘치는 시몽 사이에서 방황하는 폴의 심리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결론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몇 해 전에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폴의 결정이 지금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다. 남을 향한 인간의 감정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떤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p.9)

파리에 있는 그 누군가에 대해 그가 아는 바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누군가에 대해 그는 며칠 동안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할 수 있으리라. (p.30)


20. 바람의 열두 방향(The wind's twelve quarters), 어슐러 K.르 귄, 최용준, 시공사

열일곱 편의 초기 단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헤인 시리즈'를 제대로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단편 「샘레이의 목걸이」와 「겨울의 왕」, 희생양과 인간의 이기심을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한번 포기했었던 '뭍바다(어스시) 시리즈'를 궁금하게 만든 단편 「해제의 주문」과 「이름의 법칙」 등 우주와 지구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각 작품마다 르 귄의 코멘트가 달려 있어서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몇몇 편은 르 귄을 좇아가기에 내 상상력의 다리가 너무 짧아서 이해가 더뎠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낯선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만나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pp.227-228 아홉 생명)



※ ∪: J와 함께 읽은 책(MAGNET), 水: 격주 수요일 책모임에서 읽은 책, pop: 팝슈거 독서 챌린지, 小: 소소북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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