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파인은 독서를 좋아하기에 영어를 전공했다. "철학을 시도했지만 너무 제한적이었어요." 요즘 그는 그때만큼 책을 파지는 못한다. 그는 자신이 완독했다고 기억하는 마지막 책이 퓰리처상(2011)을 받은 제니퍼 이건(Jennifer Egan)의 『깡패단의 방문(A VISIT FROM THE GOON SQUAD)』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뜸을 들였다. "정말 좋았어요. 흘러간 시간이나 후회하는 일, 잃어버린 순간의 슬픔 같은 게 말이죠." 그리고 T.C.보일이 쓴 『WATER MUSIC(수상 음악)』에 집중할 짬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과 언어 구사 능력은 정말 놀라워요. 저는 그저 단어에 동그라미를 칠 뿐이죠."

출처 : OUT(Chris Pine: The Thinker)




읽을 책을 고르는 계기는 참 다양하다. 몇 개 꼽아 보자면, 우연히 한 작품을 읽고 마음에 들었을 때 줄지어 따라오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 서점 혹은 인터넷 서점을 유영하다가 눈에 띈 제목이나 목차, 내 취향과 비슷해서 믿고 보는 지인의 추천작,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내 흥미를 돋워서 읽게 만드는 지인의 오달진 영업력, 나만의 길티 플레져, 그리고 내가 일방적으로 애정을 주는 사람들이 읽는 책, 추천해 준 책, 필모그래피의 원작 소설들이 있다. 

개중 마지막 항목은 내 열렬한 연예인 덕질의 순기능이다. 독서가 취미이니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는 책에도 당연히 손이 간다. 소개해 준 책이 이미 아는 작품이면 '역시 우린 통해' 하고 들뜨고, 모르는 작품이면 '오,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고, 직접 읽으니 취향에 딱 맞을 때는 또다시 '우린 역시 통해' 하고 신이 난다. 마음에 안 들 땐 '이런 것도 있네' 하고 덮으며 내 삶의 경험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제법 괜찮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인터뷰나 SNS에서 읽는 중이거나 마음에 드는 책 이야기를 꺼내 주면 무척 반갑다. 물론 영화나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프린세스 다이어리2」부터 쭉 파란 눈에 디즈니 왕자님 같은 미모를 지닌 배우라고만 생각했던 크리스 파인(Chris Pine)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작년 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진[각주:1] 한 장이었다. 스타트렉 비욘드 촬영을 위해 밴쿠버에 머무를 때였는데, 사진 속의 크리스는 시내에 있는 한 헌책방에서 쭈그려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어머!' 책과 가까운 사람은 이렇다, 라고 딱 정해진 스테레오타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심결에 이질감을 느낀 찰나, 몹시 당혹스러우면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속한 사회와 미디어로 인해 알게 모르게 주입된 선입견은 생각의 폭도 좁히고, 덕질의 폭도 좁힌다.

검색해 보니 크리스는 팬들 사이에서도 책을 좋아하기로 유명하더라. 책 읽는 것이 좋아서 영어를 전공했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 모습, 양손 가득 책봉투를 들고 가는 모습, 한두 권씩 손에 쥐고 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각주:2]도 많다. 그날 생긴 호감이 1월의 「지미팰런쇼」 라이브[각주:3], 8월의 영화 「스타트렉 비욘드(STAR TREK:BEYOND)[각주:4]」,11월의 투표 독려 영상[각주:5]과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LOST IN DUST/HELL OR HIGH WATER)[각주:6]」로 쭉 이어진 참이다. 다음 달 개봉하는 영화 「최후의 Z(Z FOR ZACHARIAH)[각주:7]」에서는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고 있다.

2013년 영화 「스타트렉:다크니스(STAR TREK:INTO DARKNESS)」 개봉 무렵 아웃(OUT) 매거진에서 진행한 인터뷰 <크리스 파인 : 생각하는 사람>에서 크리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다움, 배우가 되기까지의 과정, 동료인 재커리 퀸토와의 관계,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의 두 축인 커크와 스팍의 관계, 영화배우로서의 고민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당시 관심을 둔 책으로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A VISIT FROM THE GOON SQUAD), 2010』과 T.C.보일의 『WATER MUSIC(수상 음악), 1981[각주:8]』을 꼽았다. 제니퍼 이건의 작품은 2012년 문학동네에서 나온 번역서가 있고, T.C.보일의 작품은 번역서가 나오면 좋으련만 영 소식이 없어서 아쉽다. 

책을 읽기 전 뒤표지에 발췌해 놓은 '시간은 깡패야.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라는 대사를 보고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각주:9]」의 악역 '케실리우스'가 떠올랐다. 케실리우스는 가족을 잃고 '시간'을 제일 나쁘다 말하며 다크디멘션의 지배자인 도르마무의 힘을 빌려 지구를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뒤표지의 스포일러로 제목의 '깡패단'이 시간을 말한다는 건 알아버렸는데, 이 책의 등장인물은 그 깡패가 방문했을 때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 내 호기심의 방향이 조금 어긋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책장을 넘긴지 얼마 안 된 후였지만 말이다. 

『깡패단의 방문』은 열세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각기 다른 목소리로 그려진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단단하게 엮인 직모처럼 촘촘하게 얽혀서 큰 악장을 이룬다. '케실리우스'처럼 깡패와 대적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삶 속에서 문득 시간이라는 깡패와 마주치고 비틀거리는 순간순간을 보여준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화가 난다.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나폴리에서, 아프리카에서 등 시공간은 널을 뛰고 존재감이 희미했던 단역이 다음 편에서는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디선가 스쳐지나간 이름인데 누구였는지 가물가물해서 앞으로 되돌아가기를 여러 차례, 단편과 장편 사이의 경계 어드메에 자리한 이 소설에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은 좀 걸렸지만 1인칭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2인칭 서술, 파워포인트로 표현한 자기고백 등 다양하게 도입된 형식이 무척 신선하고 흥미로워서 책을 덮기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눈 한번 깜빡인 것 같은데 어느새 2016년도 저물어간다. 늦은 밤 일기장을 펼쳐 날짜를 확인할 때마다 내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시간의 벽과 마주친다. 서른을 넘기니 주름을 걱정하며 자기 전에 마스크 팩이라도 붙여야 하나 고민하지만 시간이 주는 압박에 금새 백기를 들고 무장해제하고 만다. 삶의 전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난 몸뚱어리는 몹시 무기력하고 안일하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맞서기 위해 불법인 줄기세포 시술을 받고 국민의 세금으로 태반주사니 발기부전 치료제니 하는 것들을 구입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 저지른 수십 가지 죄를 향한 관심이 수그러지기를 바라며 그들은 꿋꿋이 버틴다. 뻔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삶의 나락에 처박혔다가 한 가락 빛을 잡은 줄스는 자신의 운명이 미국을 닮았다며, '오늘 아침만 해도 이 씨팔 놈의 세상이 다 끝났다고 했겠지만, 아직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미국뿐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다. 


『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최세희, 문학동네



+ 주석에는 사진과 영상을 달았는데 어째서인지 모바일웹과 앱에서는 태그만 보인다. 컴퓨터 버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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